7월 15일(주일) 칼럼 '요나의 혐오와 하나님의 사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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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관리자 | 작성일 | 2018.07.14 05:42 |
요즘 방송과 언론에서 많이 회자(膾炙)되는 말들 중에 ‘혐오(嫌惡)’라는 말이 있습니다. ‘혐오’라는 말의 간략한 사전적 정의는 네이버 어학사전에서 ‘싫어하고 미워함’, ‘미워하고 꺼림’이라고 나옵니다. ‘혐오’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극혐(極嫌)’이라는 말까지 사용됩니다.
기독교인은 ‘혐오’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나 혐오하지는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누구라도 혐오해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 포용(包容)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은 아니지만 마치 박애주의자나 인도주의자 같은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필자도 참된 박애주의 정신과 진정한 인도주의 정신에 대하여는 존경을 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혐오’를 상호 충돌되고 대립되는 양립(兩立) 구조의 단순한 시각으로 파악하면 안 됩니다. 요나라는 이름을 가진 구약시대 이스라엘 선지자는 자기 민족의 원수인 앗수르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을 혐오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지엄하신 하나님의 명령도 거절할 정도로 니느웨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을 혐오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의 복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악한 니느웨 사람들까지도 용서하시고 구원의 복을 주셨으니 기독교인들은 혐오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대목이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복을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악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니느웨 사람들을 복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요나서 3장을 보십시오. 니느웨 왕과 모든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돌이켜 회개했을 때 그들에게 진노의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이 점을 생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악을 인정하며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와 구원의 복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혐오’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을 무엇이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로 오용(誤用)하거나 남용(濫用)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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