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주일) 칼럼 '반려목? 의리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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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관리자 | 작성일 | 2017.06.03 05:55 |
근년부터 집에서 함께 사는 동물을 가리켜 반려동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반려식물이나 반려목(반려나무)이라는 말도 가능할지요? 우리 집은 주거지가 아파트여서 많은 나무를 기르지는 못하지만 화분에 심어진 나무 몇 그루들이 있습니다.
아주 더운 한여름이 아닌 평소에는 토요일새벽기도회를 갖다 와서 나무들에 물을 줍니다. 그런데 지난 주 토요일 아침에는 집에 분주한 일이 있어서 물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늦은 오후에 아담한 산호수가 풍성한 가지들을 내리고 힘들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급하게 물을 주었더니 한참 후에야 다시 축 처졌던 가지를 다시 들고 기분 좋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호수는 꽃집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것이지만 제게는 남다른 애정의 추억이 있습니다. 지하에서 6년간 교회를 목회했을 때 교회가 오픈하는 시간에 지인이 두 그루의 산호수를 교회에 선물로 준 적 있습니다. 두 그루의 산호수는 햇볕도 거의 없고 겨울밤에 난방도 안 되는 환경에서 교회를 새로운 목회자에게 이전하는 그날까지 모두 살아주었습니다. 다른 여러 나무들은 거의 1년 정도 지나면 죽거나 길어도 몇 년 더 살았었는데 말입니다.
대전으로 이사를 와서 꽃집에 가서 제일 먼저 산 나무가 산호수입니다. 지금도 고맙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려목(반려나무)이란 말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니, 반려목(伴侶木)보다 의리목(義理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힘든 환경에서도 산호수는 6년간 제 곁에서 의리를 지켜 주었으니까요.
예수님도 의리 없는 사람들 때문에 실망이 크셨던 모양입니다. 언젠가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계산하기 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계속 따라가도 더 이상 얻는 것이 별로 없겠다는 판단을 하였을 때 많이도 떠나갔습니다(요 6:66).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고 차라리 배반하지 않는 개를 반려견이라고 부르며 사랑하고, 나무까지도 반려목이라고 심지어는 의리목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의리의 주님이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 변심하기 잘 하고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닮기를 소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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