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나눔]다일공동체의 다일영성수련회 -이강학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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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관리자 | 작성일 | 2012.01.12 14:55 |
다일공동체의 영성(다일영성수련회)
이강학(UC버클리 G.T.U. 영성신학 박사과정)
1. 나와 다일공동체: 첫 만남
한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되고 내 인생의 구주로 영접하게 된 나는, 평생 섬길 교회를 찾아 나섰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모델 삼아 내가 참여하고 싶은 교회의 기준 세 가지를 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 세 가지 기준은
첫째,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교회일 것,
둘째,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교회일 것,
셋째, 개혁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일 것이었다.
1991년 가을 어느 날, 나에게 <창세기>를 배우던 한 후배가 청량리에 있는 어떤 목사님과 그 교회를 소개했다. 그 후배를 따라 참여했던 첫 주일예배의 충격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마가의 다락방”의 한국판이라고 할 만한 청량리 역전 5층 상가 건물 옥탑에 있던 가건물, 카펫 위에 무릎 꿇고 앉은 서른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의 발 냄새, 성례전을 집례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엉엉 우시던 최일도 목사님, 축도 후 동그랗게 둘러서서 목사님을 따라 돌아가며 한 사람씩 반갑게 끌어 안아주던 성도들, 식사 후 다시 원을 그리고 앉아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예배당을 정리한 후 큰 국통과 밥통, 식기들을 리어카에 싣고 청량리 역전을 지나 공동체로 가면서 난생 처음으로 본 청량리 588 거리와 언니들, 언니들이 낚아채간 안경을 겨우 돌려받고 식은땀을 흘리며 공동체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성자되기 첫걸음은 설거지부터”라는 문구, 설거지를 마친 후 방에 들어가 차를 마실 때 천정에서 들리던 쥐들의 마라톤 소리. 나는 그 날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알게 되었다.
2.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영성학자 샌드라 쉬나이더스에 의하면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 신앙에 기반 한 삶의 전반적인 경험”을 주 소재로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모든 삶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기독교 영성을 이해하려면 단순한 듯 보이는 이 표현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기독교 영성의 출발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또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기독교 영성이 된다. 3-4세기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막으로 나가 평생을 살면서 예수님의 “청결한 마음”(the purity of heart)을 추구하던 안토니와 파코미우스를 비롯한 사막교부들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그 사막교부들로부터 큰 영감을 얻어 5-6세기에 이탈리아의 산에 정주수도원을 세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과의 일치”(the union with God)를 추구하던 베네딕트를 비롯한 수도원장들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12-13세기, 부유해지고 타락한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난과 전도”(the poverty and evangelization)를 추구하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탁발 수도회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또, 중세에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의 고통”(the passion of Christ) 마저도 남김없이 맛 보기 원했던 시에나의 카타리나, 폴리뇨의 안젤라, 노르위치의 줄리안 등 여성 수도자들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16-17세기, 타락한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복음의 은혜성”(sola gracia)과 “성경의 중요성”(sola scriptura)을 강조했던 루터와 칼빈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20세기 대표적인 기독교 영성은 서양에서는 본회퍼, 마틴 루터 킹, 테제의 로제, 마더 데레사, 한국에서는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이현필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외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든 알려져 있지 않던 시대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아 살았던 “구름과 같이 허다한” 기독교 영성가들이 있고 그들의 경험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둘째,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이다. 믿음을 고백한 기독교인의 모든 경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가는 자신의 경험 자체를 공로화, 절대화하지 않는다. 다만, 겸손하게 광야에서 구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따라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고 성령이 일으키시는 깨달음과 마음을 따라갈 뿐이다.
셋째, 기독교 영성의 대상은 그 믿음 위에서 나오는 “모든 삶의 경험들”이다. 성령의 역사는 공간적으로 교회 안에만, 시간적으로 예배 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영성에 예배가 중심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기독교 영성은 우리의 모든 일상도 성령이 활동하시는 영역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들꽃이 주는 깨달음, 한 마디 말이 가져 온 상처 또는 위로 등을 포함해서 우리 눈이 본 것, 우리 귀가 들은 것 등 외부에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 온 자극, 또는 우리 마음 안에서 스스로 일어난 느낌, 생각, 깨달음 등 모든 것 안에 잔잔한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내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엘리야가 들었던 잔잔한 바람 같은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침묵하며 모든 일상을 주시할 때 나오는 경험이다. 그 경험 안에서 일상은 신비가 되고 신비는 일상이 된다.
3. 영성수련, 영성식별, 영성지도
기독교 영성생활의 목표는 전통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Union with God)에 있었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사신 삶의 모범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본받아 살려고 하는 모든 노력이 기독교영성생활의 주 내용이 되었다.
또 기독교 영성가들은 영성 생활의 과정을 이해하기 쉽도록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삼아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 그리고 일치(unification)이다. 정화의 단계에서 나는 자유를 잃고 사는 나를 발견한다. 율법과 틀의 노예가 되어 사는 나를 발견한다. 이기적인 욕심,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상처투성이인 나를 발견한다. 동시에,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강한 욕망이 일어난다. 조명의 단계에서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을 충만하게 경험한다. 이 때의 지식은 머리를 키우는 정보의 지식(informational knowledge)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을 포함해서 총체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영적 지식(transformational spiritual knowledge)이다. 일치의 단계에서 나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 하나님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관상(contemplation)할 뿐이다. 이 관상의 순간은 너무 짧기도 하고 너무
길기도 해서 세상의 시계로 잴 수 없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한 기독교 영성가들은 그 삶이 예수님을 닮아
갔다. 그들은 많은 신비 체험을 하고 치유의 기적들도 일으켰지만, 더욱 스스로를 작다고 하며 겸손해졌다. 그래서 주변에 제자들이 모여들어 함께 살며 배우기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적 스승에게 영성 생활에 대해 물었다: 특별히, 기도에 대해서, 공동생활에 대해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성령의 역사를 식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것이 영성식별(spiritual discernment) 과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 라는 오랜 기독교 전통을 만들었다.
영성식별과 영성지도는 “하나님과의 일치”(union with God)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기”(imitation of Christ)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모든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도구들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고 이냐시오 로욜라 같은 영성가들은 영성지도자의 도움 없이 영성생활의 성숙은 없다고 공히 선언했다. 또한 올바른 영성지도자를 찾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올바른 영성지도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듯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안내할 능력, 경험, 그리고 성품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영성지도자는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자기가 갔던 길만이 옳다고 모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서 그 사람을 어디로 부르시는가를 예민하게 살피고 그 부르심을 그 사람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친절하고 솔직한 표현으로 도와준다. 영성지도자는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다양한 기도의 방법을 알고 있고 그 사람에게 맞는 기도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 찾도록 도와준다. 영성지도자는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사람이다. 고정관념과 편견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들을 때, 상대방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공명할 수 있다.
영성식별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지혜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영적 지혜이다. 영성식별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고, 영성수련회를 통해 계발되기도 한다. 영성식별의 직관이 뛰어난 소수의 사람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영성수련회를 통해 식별의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영성식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는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수련교본에서 “성찰 기도”(The Examination of Conscience) 와 “영성 식별법”(Rules for Spiritual Discernment)을 제시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종교적 정감”(Religious Affections)이란 책에서 미국 영적대부흥기(The Great Awakening)에 경험한 일들 중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종교적 정감의 특징 열두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Courage to Teach)를 포함한 여러 저작에서 퀘이커의 영성식별법인 “맑게하는 모임” 또는 “명료 위원회”(Clearness Committee)를 소개하고 있다. 영성식별의 요지는 결국 내 생각(thoughts) 과 느낌(feelings)의 근원(roots) 과 방향(direction) 을 알아차리는데(noticing) 있다. “알아차리기”가 영성 식별의 주요 자료가 된다. 따라서, “알아차리기”는 가장 중요한 영성 수련들 중 하나가 된다.
4. 다일공동체의 영성수련회
다일공동체의 20년은 긴 기독교 역사의 지평에서 볼 때는 무척 짧은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20년 사이에 하나님이 다일공동체를 통해 일으키신 일을 보면, 기독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령의 역사를 집약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한국 기독교 영성사에 길이 남을 큰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일공동체 영성수련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기도와 실천 또는 관상과 실천
(contemplation and action)의 균형을 잘 잡고 있다.
균형 잡힌 영성은 기독교 영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모든 존경받고 신뢰받는 영성가들은 기도와 실천에 균형이 잡혀있다는 특징이 있다. 혹자는 사막의 영성가들이나 봉쇄수도원의 영성가들이 세상을 도외시하지 않았는가하고 의문을 던지지만, 그들 역시 기도를 통해 교회의 일치와 세상의 정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알 수 없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깊이 있는 신비기도 체험의 소유자였지만, 부와 권력으로 타락한 수도원을 개혁하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실천에도 큰 역할을 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는 탁발수도회의 창시자로서 세상 속을 다니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지만, “태양의 노래”와 같은 기도문에 담겨있는 그의 기도의 깊이는 어느 사막 영성가, 봉쇄 수도원의 영성가 못지 않다. 봉쇄수도원인 트라피스트 겟세마니의 수도사였던 토마스 머튼은 전혀 신문을 읽지 않았지만, 그에게 기도와 영성지도를 요청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보낸 친구들의 편지를 통해, 누구보다도 세상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편지의 내용을 상황(context)으로, 기독교의 영성고전들(text)을 바탕으로 해서, 현대인이 폭력적이고 경쟁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영성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글로 써서 많은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끌었다. 본회퍼 역시 그의 저술 “Life Together”에 잘 나타나듯이, 깊이 있는 공동체 기도 생활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기 위한 비밀 공작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일공동체는 다일영성수련회를 통해 기독교영성사의 기도 생활 즉 관상 생활의 맥을 잇고 있는 한편, 밥퍼나눔운동본부와 다일천사병원 및 중국,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에 있는 공동체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영성사의 실천 즉 구제긍휼사역의 맥을 잇고 있다.
둘째, 다일공동체의 영성수련회는 기도와 실천의 균형을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와 실천 그 각각에 있어서도 기독교 영성사에 기반한 바른 기도의 길, 바른 실천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대다수 한국개신교인에게 “기도”는 무엇인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소리를 내서 하는 구송기도로서 집단적 통성 기도와 대화식 기도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내용에 있어서는 “주시옵소서!”를 강조하는 청원 기도가 주를 이루고 감사 기도와 찬양 기도가 보태지고 있다. 기도의 도입으로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Quiet Time) 또는 찬송하기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의 전통에는 훨씬 깊이 있고 다양한 기도에 대한 이해와 방법들이 있다. 우선, 내 생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청원 기도는 기도의 주목적이 결코 아니다. 기도의 주목적은 “하나님과의 일치”에 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다. 그리고, 기도에 있어서 소리는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기도의 대부분은 침묵이다. 말을 하기 보다는 듣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기도의 시작은 성경 묵상, 기도문 암송, 성화관상, 자연 묵상 등에서 시작한다. 기도 시간에는 성경 묵상을 머리로 연구하고 따지기보다는 가슴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찾으려고 애쓴다. 시편이나 영성가들의 기도문은 좋은 기도의 안내자가 된다. 성화(icon)를 보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나 느낌을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기도 한다. 나무나 풀, 시냇물 소리가 기도의 좋은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기도의 수단들은 하나님과 머리로 만나는데서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만나도록 이끄는 수단일 뿐이다.(이 기도의 수단들을 넓은 의미로 영성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뒤로 하고, 내 생각과 느낌도 뒤로 하고, 마침내 하나님과 나만 함께 있는 상태에서 잠시나마 그 하나님을 지극한 사랑의 눈을 바라보며 만나는 것에 이른다. 이 상태의 기도를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라고 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사랑의 시선으로 오래 바라보기”(a long loving look at the real)라고 하기도 한다. 이 관상기도의 경험은 하나님을 아는 경험이기도 하고 나를 아는 경험이기도 하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 위한 경건 생활은 결국 바로 이 기독교 영성사의 깊은 관상기도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일영성수련회에서는 기독교영성사에 바탕을 둔 침묵기도, 예수호칭기도(Jesus Prayer), 거룩한 성경 읽기(Lectio Divina), 자연묵상 등을 소개함으로써 한국 개신교인들의 기도에 깊이와 넓이를 더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다.
다일의 영성은 바른 기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할 뿐만 아니라, 바른 실천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다일공동체가 처음 출발하던 80년대 시절만 해도,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은 실천이라고 하면 개인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와 선교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이자 한국 복음주의 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친 빌하이벨스 목사의 고백을 필두로,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한 복음 전도와 선교는 영성의 천박성과 함께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한편 진보적 기독교인은 민중신학적 이념에 기반한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만이 진정한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는 실천은 그 명분이 아무리 올바르다고 해도 역시 그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 다일공동체는 말로만 전하는 복음 전도와 선교가 아니라, 청량리 윤락가 한복판에서 살면서 노숙자, 독거노인들에게 밥을 퍼주고 언니들을 감동시키며 말이 아닌 몸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다. 또 다일공동체는 운동권의 머리가 아니라 “생활권”의 가슴으로 사회의 밑바닥 생활에서부터 나오는 진정한 부르짖음을 대변했다. 다일공동체의 바른 실천에 대한 이런 끊임없는 질문과 응답이 오늘 복음주의적 기독교인과 진보적 기독교인의 공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 다일공동체의 영성은 한국적 영성과 서양 기독교 영성을 적절하게 통합하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영성수련회, 영성식별, 영성지도 등의 방법은 모두 서양 기독교 영성가들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다일공동체는 기독교 영성사에 있는 영성 수련의 방법들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현대 기독교 공동체들에도 관심을 갖고 교류를 하고 있다. 떼제공동체와 브루더호프공동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의 본질이 공동체성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 상처 받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음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일의 영성수련회는 한국적 영성이다. 영성이 자기 중심성과 이기적 욕심을 초월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다룬다고 할 때, 그 경험은 다분히 기도하는 사람의 문화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이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경험과 서양 기독교인이 영적 감동을 받는 경험은 상당히 다르다. 문화심리학자들은 그 이유 중 하나로 서양인들의 자아(self)와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 사람들의 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든다. 서양인의 자아는 독립적(independent)이고 개인적(individualistic)인 반면, 한국인의 자아는 관계적(relational)이고, 의존적(interdependent)이고, 집단적(collective)이다. 한국인은 관계로 매이고 관계로 푼다. 관계에서 오는 한국인의 상처는 서양인에 비해 무척 심각하다. “화병”은 한국인의 문화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병이라고 세계의학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다일영성수련회에서 “화”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된 것도 “화”를 생성하게 되는 관계가 한국인에게 얼마나 심각한가를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 받는다면 한국인의 인간 관계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아울러, 인간 관계와 직결되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더욱 원활한 소통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일 영성수련회의 한국적 특성은 “밥”이라는 낱말에 모두 담겨 있다. 다일의 영성수련회는 “빵”의 영성이 아니라, “밥”의 영성, “진지”의 영성이다. 청량리의 “밥퍼나눔운동본부”에서 매일같이 최상의 쌀로 지어져서 나누어지는 “밥”에 다일의 영성이 담겨 있다. 또한, 다일공동체의 식사시간마다 드려지는 “진지기도”에 다일의 영성이 담겨 있다. 아울러, 다일영성수련회 때 행해지는 “진지 알아차리기”에 다일 영성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진지 상에 오른 알곡들, 채소들과 고기들의 색깔, 크기, 모양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살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결심하는 모든 경험이 지극히 친근한 한국적인 경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일의 영성수련회는 그 이름 그대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영성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가 곧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다름이 곧 틀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일공동체는 내 기준과 고정관념으로 나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다름에서 오는 개성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 다름을 아름답게 조화시킬 수 있는 일치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다일의 영성수련회가 지향하는 바이다.
5. 나와 다일공동체: 그 후
나는 그 후 다일교회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결혼을 하고, 교육 전도사와 교육 목사의 사역을 하였다. 유학 가면 신약성서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1999년 다일영성수련회 1단계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최일도 목사님의 조언을 바탕으로 기독교 영성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영성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라는 진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가 가진 재능 중에 그나마 “배워서 남 줄 수 있는 것”이 책 읽고 공부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어 가장 심오하다는(?) 학문에 도전하였다. 흔히 박사 과정 학생들이 공부를 할수록 더 메말라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기독교 영성은 그와는 달리, 배우면 배울수록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자유해지고 더 뜨거워진다는 것을 경험했다. 다일공동체교회를 통해 다일의 영성수련회를 경험하고 기독교 영성을 공부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다일영성수련회의 산 증인 중 한 명이 된 것이 무척 영광스럽다. 다일공동체 20주년을 맞이하며 정말 감개가 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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